CJ올리브영, 편집숍에서 플랫폼으로: 한국형 H&B 스토어의 진화
‘한때의 유행’이라 여겼던 이름, 올리브영
1999년, 강남 한복판에 낯선 매장이 문을 열었다. 약국처럼 생겼지만 화장품도 팔고, 편의점 같은 진열에 건강식품도 있었던 곳. 이름은 ‘올리브영(Olive Young)’. 당시엔 아무도 이 매장이 20년 후 한국 뷰티 유통의 중심축이 될 줄 몰랐다. 더구나 CJ그룹이라는 대기업이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실험을 하리라 예상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올리브영은 시작부터 ‘혁신’을 지향했다기보다, 그저 새로운 유통 모델을 테스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특히 2010년대를 거치며, 올리브영은 단순한 매장을 넘어 ‘브랜드들의 전시장’이 되었고, 지금은 국내 뷰티 트렌드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때의 유행’이 ‘지속 가능한 플랫폼’이 되었을까? 올리브영의 과거를 되짚어보면, 단순한 뷰티 편집숍을 넘어선 치밀한 전략이 보입니다.
1. 탄생과 초창기 (1999~2010): 낯선 콘셉트, 그러나 새로운 기회
올리브영의 첫 매장은 1999년 12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생겼다. 당시만 해도 'H&B(Health & Beauty)'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소비자들은 "이게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약국인가, 마트인가, 화장품 가게인가? 모두 아니면서도 조금씩 닮은 존재였습니다.
초기의 올리브영은 ‘건강과 아름다움’을 키워드로 한 헬스케어+뷰티 복합 매장을 지향했다. 일반 약국에선 팔지 않는 건강기능식품과 생필품, 그리고 다양한 브랜드의 기초·색조 화장품을 함께 진열해 ‘선택의 다양성’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 단일 브랜드 중심의 로드숍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이었다.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장하기보다는, 대도시 중심의 테스트 매장을 운영하며 고객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CJ그룹 내부에서도 성공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특히 20~30대 여성 소비자들이 ‘여러 제품을 한 번에 비교하고 고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올리브영은 ‘생활밀착형 유통 실험’이라는 성격이 강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유통 카테고리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성장과 전환기 (2011~2019): 로드숍의 몰락, 올리브영의 도약
2010년대 중반은 한국 뷰티 유통 시장의 판도가 바뀌던 시기였다. 로드숍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온라인 쇼핑과 홈쇼핑 중심의 구매 패턴이 증가하면서 오프라인 매장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격변 속에서 올리브영은 오히려 매장을 더 늘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브랜드를 모으는 편집숍’에서 ‘트렌드를 제안하는 플랫폼’으로 전략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매장을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디스플레이, 동선, 진열 방식 등을 모두 콘텐츠처럼 설계했습니다.
이 시기에 ‘K-뷰티’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며, 올리브영 역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핫플레이스로 부상했다. 홍대, 명동, 강남 등의 핵심 상권에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고, SNS 콘텐츠로 연결되는 소비 경험을 강화했다. 온라인 쇼핑몰도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에 올랐습니다.
또 하나의 핵심 전략은 자체 브랜드(PB) 상품 강화였다. 단순히 기존 브랜드 제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CJ의 R&D 역량을 기반으로 스킨케어·헤어·바디 라인까지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대표적인 예가 ‘라운드어라운드’, ‘브링그린’과 같은 브랜드들이다. 품질, 콘셉트, 가격 경쟁력 모두를 잡은 PB 제품들은 소비자들에게 빠르게 자리 잡으며 매출을 견인했습니다.
결국, 이 시기는 CJ올리브영이 ‘단순한 유통 채널’이 아닌, 브랜드의 등용문이자 트렌드의 주도자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한 시기로 평가됩니다.
3. 팬데믹 이후현재 (2020): 디지털 기반 뷰티 플랫폼으로 진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 유통 시장을 뒤흔들었을 때, 대부분의 오프라인 매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CJ올리브영은 빠르게 디지털 전환에 성공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전략은 ‘오늘드림’ 당일배송 서비스다. 올리브영은 전국 1,300여 개 매장을 지역 물류 거점으로 활용해, 고객이 주문한 제품을 몇 시간 안에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는 단순한 온라인몰이 아닌,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합한 O2O(Online to Offline)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바일 앱의 사용자 경험(UX)을 개선하고, 데이터 기반의 개인 맞춤형 추천 시스템을 강화하며 ‘디지털 큐레이션’을 실현했다. 이는 제품 검색, 체험 후기, 리뷰, 장바구니 경험이 모두 데이터화되어 다음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러한 디지털 전략은 2021년 올리브영을 국내 1위 H&B 스토어에서 뷰티 커머스 리더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실제로 2022년 기준 CJ올리브영은 연 매출 2조 원을 돌파했고, 유통업계 전반의 침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매년 매장 수를 늘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변화는 ‘MZ세대의 뷰티 놀이터’로서의 입지다. 최근 올리브영은 메타버스 기반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SNS·인플루언서와 협업한 마케팅으로 ‘디지털 감성’에 맞는 유통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뷰티를 즐기고 탐험하는 공간으로 진화 중입니다.
‘유통을 재정의한’ 한국형 플랫폼의 롤모델
CJ올리브영의 20여 년 역사는 단순한 유통사의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 자체를 창조하고, 문화로 만든 브랜드’의 이야기다. 편집숍이라는 낯선 모델에서 시작해, 로드숍의 몰락 속에서 기회를 읽고, 팬데믹 위기 속에서도 디지털 전환으로 대응한 그들의 행보는 한국 유통 산업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올리브영은 더 이상 ‘CJ의 매장’이 아니라, 수많은 브랜드들이 데뷔하고 소비자와 만나는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는 더 정교해지고 있으며, 더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춤형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 올리브영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정확히 예측하긴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단 한 번도 머물러 있지 않았고, 언제나 고객의 반 발짝 앞을 내다보며 움직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유통업의 한계를 넘은 플랫폼의 본질이자, CJ올리브영이 여전히 뜨거운 이유입다.